사람들은 행복과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주겠다는 현대에서, 개개의 자아로서 그리고 무리의 일원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과연 행복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일까, 사회는 뭘 어떻게 보장해주겠다는 것일까. 그저 계몽주의 이래 똑같은 외침을 반복할 뿐 아닌가? 물론 큰 영향하에 세계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결국 본래의 취지는 그 사지를 제대로 뻗어보지도 못한 채 뒤틀리고 말았다. 오늘날 삶의 순간에서 사람들은, 나는 무엇을 좇는가, 무엇에 이끌리는가.
얼마 전 그런 화두가 있었다.
'Good citizen VS Good Person'
뭐 길게 얘기했던 건 아니고 잠시 동안의 화제였긴 했지만 쉽사리 잊혀지기 힘든, 굵직함을 느꼈달까. 교복을 입고 다녔던 시기 한 번 선생님께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좋은 사람과 착한 사람은 같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얘기도 없이 뜬금없는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긍정하셨다.
시민으로서 선량한 사람과 개인으로서 선량하려는 사람의 구도는 같지 않으며, 언제나 경쟁과 긴장 속에 대립할 수밖에 없다. 말이 나온 게 시티즌이라 시민이란 단어가 나오긴 했지만 뭐 어쨌든 그룹의 일원과 고유한 개별자의 입장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내포했던 실패(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주의 실패 운운하기는 좀 그렇지만 최소한 성공적인 상태는 아니라고 여겨진다)의 공통 분모, 공동체에의 덕성을 결핍한 개개인의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떠올리면서 대중은 Good Person의 길을 가려는 경향이 강하지 않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짐작에서는 이렇다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실상, 현실적 조건에 의하여 Good Citizen에의 접근성이 훨씬 유리하고 이익 추구에도 협조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익이란 다수가 모여 활동하는 시장에서 창출 가능하고, 심지어 타의 시선이 없으면 이익이라 부를 것도 없어진다. 그 시선이 동경이든 시샘이든. 접근성에서 유리하다 주장하는 까닭은 사람들에게 Good Citizen과 Good Person이 요구하는 역할, 운동, 능력 등의 제시 조건들을 가정할 때 Good Citizen이 한결 수월하고 매력적인 제안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요구라는 행위가 가능한 전제의 사회관계구조를 생각하면 당연히 시민의 역할이나 능력이 그저 홀로 서 있는 개인보다 월등하고 부지런해야 할 것이라는 추론이 생긴다. 하지만 과연 요구받는 것과 요구가 없는데 뭔가 이루어야 하는 것 중 어느 게 쉬운 길일까. 개인으로서 Good 상태를 이룬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규범이 대중에게 치우칠 수록 Person은 다시 시민의 입장으로 회귀하며, 멀어지면 그럴 수록 심화되는 철학적 갈등과 지독한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붓다는 고통에서의 해방으로 집착하지 말 것을 얘기했고,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구원과는 다르지만 방법론으로써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감각이 파괴되지 않은 채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느낌이 끊긴 것이 아니면서 느낀 것에 동요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인지한 대상의 개념화, 추론 같은 정신 활동 일체를 파악하고 통제하여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얘기인데, 헤겔이 바라보는 스토아적 태도와 연관지어 보자면 또 의구심이 들게 된다. 외부 우주의 활동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자유를 성취했지만, 그것이 과연 살아있는 자유인가에 대해서는 물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 중 주인만이 엄숙한 표정으로 집에 틀어박힌 모양이지 않을까? 붓다의 방식, 스토아적 태도에서의 이러한 정적인 상태를 통한 열반, 평정은 정말 자유롭다 하기에는 오히려 일관된 속박에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여겨지는 면이 없지 않다. 생명의 모습이 옅어지지 않겠는가? 그러한 삶이 행복을 말하더라도 진정 자유라 일컬어지기에 완전한 것일까?
Good Citizen이나 Good Person이나 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사회구조를 계획하는 공적 이성이나 개인의 철학적 성숙함이나 아직 덜 자랐기 때문이다. 양쪽을 생각하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갈피를 잡기가 힘드니 산만한 하루의 삶이 연속으로 쌓이기만 할 뿐.